목간이란 종이가 보편화되기 이전 시기에 문서 작성을 위해 쓰인 나뭇조각으로, 대개 나무를 기다란 모양으로 깎아 만들었다. (…) 목간은 바로 그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문자 자료임이 분명하다. (…) 그러나 아직도 일반인에게는 백제의 목간 자료가 낯설기만 하다. 그간의 백제사 연구에 기반하여 단편적인 목간 자료를 어떻게 쉽게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이 책을 꾸미게 되었다. (…) 작은 나뭇조각인 목간에 기록된 묵서 하나하나를 좇아가는 열여섯 번의 시간 여행을 거치면서 독자들 또한 백제인의 생활상을 좀 더 입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목간은 나뭇조각에 의사 표시를 하기 위해 글씨를 쓴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그것이 출토된 유적의 연대나 성격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당대의 여러 가지 생활상을 보여 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사회상을 유추할 수 있는 사료적 성격을 띠고 있다.
- 14쪽, 〈1장 목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목간은 당대 사람들이 직접 작성했던 기록물이다. 그러다 보니 목간을 작성했을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관념이 담기게 된다. 목간을 통해 고대 사회를 복원할 수 있다면, 백제 목간으로 백제 사회를 복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백제 목간은 작은 나뭇조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백제 역사를 생생하게 이해하고, 백제 사회를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 37쪽, 〈2장 백제 목간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중에서
외경부 목간은 쌍북리 280-5번지 유적 중 동서 방향의 도로 주변에 물이 흘러들어 가서 형성된 황갈색 모래층에서 출토되었다. 목간에 적힌 ‘외경부’라는 관청 이름을 따서 일반적으로 ‘외경부 목간’이라고 부른다. 목간의 ‘?부’자는 ‘部부’자의 왼쪽 부분을 생략하고 오른쪽 부분만 쓴 것으로, 목간에서 자주 보이는 글자다. 의미는 ‘部’자와 같다. 이 목간은 “외경부의 철鐵. 면綿 10량을 대신한다”는 해석문에서 보이듯, 외경부에서 ‘면 10량’의 대가로 거두어들여 창고에 보관하던 ‘철’의 포대에 붙어 있던 꼬리표로 파악된다. -54쪽, 〈3장 중앙행정기구를 움직이다〉 중에서
2006년 백제 시대 목간이 백제의 왕경王京이 자리했던 곳이 아닌 남쪽 지방 나주에서 여러 점 발굴되었다. 백제의 지방에서 목간이 다량 발굴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이곳에서는) 목간을 포함하여 나무로 만든 목제품이 모두 65점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는 묵서가 남은 목간은 모두 13점이다. 복암리 3호 목간에서는 ‘덕솔德率’을 비롯한 백제의 관등명이 확인되었고, 11호 목간에는 ‘경오년庚午年’이라는 간지가 적혀 있어 목간의 제작 시기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간지 ‘경오년’과 백제의 관등명을 함께 고려하면 대부분의 복암리 목간은 61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92, 95쪽, 〈5장 지방의 행정과 관리들〉 중에서
지약아식미기 목간은 4면으로 된 목간이다. 이 목간은 처음에는 식미 지급 관련 내용을 기록하였다가, 다른 내용을 기록하는 용도로 쓰였고, 나중에는 습자용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여러 번 재활용된 것은 이 목간이 처음이다. 지약아식미기 목간에는 약아, 식미 지급, 일당제, 도량형 단위 등 문헌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 생생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약아는 당나라에서도 보이지 않고 백제에서만 보이는 의료 관직이다. 특히 ‘아兒’자가 붙은 관직은 약아가 최초이다. - 171쪽, 〈약재를 채취하여 병을 고치다〉 중에서
쌍북리 유적 출토 ‘목간 C’는 발굴 후 5년 만에 ‘구구단 목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크기와 모양을 살펴보면 (…) 삼각자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형태로 보아서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 구구단 목간의 발견은 백제 사람들의 산술 능력에 대한 의문에 마침표를 찍었다. 국가 체제를 갖추고 다수의 집단과 세력을 통치하던 백제에 산술법이 없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 토지의 면적을 알아야 생산물의 양을 계산하고 세금을 매길 수 있다. 또한 제방이나 성을 쌓는 등 역역을 부과하고 군대를 운용하기 위해서도 셈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당연히 백제도 이런 정도의 산술은 충분히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풍납토성 같은 막대한 노동력과 물자와 시간이 투입되는 토목공사도 할 수 있었고, 군대를 동원하여 주변 세력과 전쟁을 할 수도 있었다. - 247~250쪽, 〈12장 곱하기와 나누기를 배운 흔적〉 중에서
왕실 사원인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각종 목간들은 6세기 중반 백제 사회와 종교 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여러 목간 중에는 이 절의 건립과 운영 과정에서 사용한 것으로 볼 만한 목간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보희사寶憙寺’라는 절의 이름과 함께 ‘송염送?’이라는 글자가 쓰인 목간이 있다. (…) 그동안 많은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가진 글자는 ‘보희사’로, 이 이름은 새롭게 확인된 백제 당시의 절 이름이다. 그리고 ‘4월 7일’이라는 부처님오신날(음력 사월 초파일) 즈음의 날짜가 절 이름과 함께 기록되어 있어서 이 목간을 부처님오신날 행사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4월 7일 보희사에서 이곳 능산리에 온 승려에게 왕실 사원 측에서 행사 후 답례품으로 소금을 주었다는 해석이다. (…) 그렇다면 소금을 보냈다는 문자 기록이 능산리 절터에 남겨져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 301~304쪽, 〈15장 절에서 절로 소금을 보내다〉 중에서
최근 심심찮게 출현하는 목간은 기존의 틀에 박힌 백제의 도교 인식에 변화를 주어 생동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제인의 역동적인 생활 모습이 도교적 목간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불로장생을 위한 선약 복용 풍습을 보여 주는 오석 목간, 재앙을 쫓고 복을 구하는 주술적 도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삼귀 목간과 남근형 목간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음양 사상을 보여 주는 태극문 목제 유물은 발견된 지역과 관련하여 또 다른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 이렇듯 새롭게 발견된 목간 자료들은 박제화된 미라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백제인의 도교적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 342~343쪽, 〈16장 백제 도교의 표상〉 중에서